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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의 일생 공적 소개


        20세기 중화 민족의 100년 굴기의 사시에서 세계를 주목시킨 등소평이란 이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일생은 중화 민족, 국가의 운명과 연결되었으며 그는 공산주의 사업과 국가의 독립, 통일, 건설을 위하여 70년 남짓이 분투하였다. 그의 일생은 찬란하면서도 전기적인 색조를 가진 인생이었다. 그는 중국을 변경시켰고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전당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산당원의 선진성 교육활동을 전개하는 오늘에 절실히 등소평 동지의 전기적인 일생을 회고하고, 많은 당원이 깊이 중국 혁명사와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하고, 깊이 등소평이론을 이해하며, 진일보로 이상적인 신념을 확실히 하며 "3개 대표"를 이행하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등소평 동지의 파란곡절이 많은 인생 과정을 따라 우리는 함께 과거 100년 세상의 변천을 느껴보면서 세기적인 위인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돌이켜 보기로 하자.
       1904년 8월22일, 등소평은 사천성에서 광안현은 협흥향(지금의 광안시 협흥진) 패방 마을의 등씨 가정에서 탄생하였다. 등소평의 본명은 등선성이며 항렬에서 장남이고 세 남동생과 누나 한 분 그리고 두 여동생이 있었다. 1909년, 다섯살인 등소평은 한림원 사숙에서 글을 읽었다. 선생님은 그의 이름 “선성”이 성인 공자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다고 이름을 등희현이라 개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이 이름을 18년간 사용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중국은 동란과 변혁의 시기에 들어섰고 제국주의자들은 포화로 중국의 대문을 열었으며,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심연에 떨어지게 되었다. 1919년, 베이징에서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5•4 애국 운동이 폭발하였다. 이때, 광안(廣安)의 학생들도 학생 애국회를 성립했고, 광안(廣安)현립중학교에서 공부하던 등소평도 동창들과 함께 일본 상품 배격 및 시위행진, 동맹 휴교 등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런 활동은 등소평의 인생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일으켰다.
       5•4 운동 전후, 중국에서는 프랑스 유학 근공검학 고조가 일어났다. 동맹 회원이며 혁명가인 오옥장(吳玉章)의 제창으로, 중경에 프랑스유학근공검학준비학교를 창설하였다. 1919년 가을, 등소평은 중경프랑스유학근공검학학교에 입학하였다. 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그는 80 여명 동창들과 함께 중경 조천문 부두에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상해를 통하여 배를 타고 프랑스에 도착하여 근공검학을 시작하였다. 그때 등소평은 외지에서 손재간을 배워보자는 타산이었고 이번 걸음이 돌아설 수 없는 길임을 알지 못하였다. 1
       1920년9월, 등소평과 그의 동창들은 상해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짠트라이펑”호 연락선을 타고, 49일간의 해상 여행을 걸쳐, 10월에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고 다음 파리에 도착하였다. 중국프랑스교육회의 도움으로, 등소평은 노르망디 바에중학교에서 입학하였다. 생활의 어려움으로 그는 학교에서 수개월을 수업한 후 대부분 시간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921년 3월, 등소평은 수업료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바에중학교을 떠나야만 했다. 나중에, 등소평은 선후로 프랑스 스나이더압연공장, 하찐선고무공장, 르노자동차공장에서 압연 노동자, 구두 제작사, 기계조립 노동자로 일하였다. 등소평은 키가 작았지만 젊었을 때 막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 때 프랑스도 중국 청년들이 지망하는 천국이 아니었는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경기 불황을 겪었고 수많은 퇴역군인의 귀향으로, 프랑스 국내 실업률이 크게 상승하여, 프랑스 유학에서 실학, 실업, 기아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중국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은 이곳에서 깊이 생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자본주의 착취의 잔혹을 느꼈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으로, 그와 몇몇 선진적인 중국 유학생은 마르크스주의를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등소평은 유럽 주재 중국소년공산당(나중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유럽 지부로 개편)에 참가하였고, 1924년에는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되었다. 이때로부터 등소평은 프롤레타리아 전문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였고 공산주의를 단호히 신앙하는 전사로 되었다. 이때 그는 또한 《적광》 잡지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뛰어난 사업 실적으로 “등사 박사”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근무하면서 혁명 활동에 종사하였고, 그들의 정당 단체 활동은 프랑스 경찰 당국의 밀접한 주의를 일으켰다. 1925년6월부터, 등희현이라는 이 이름은 빈번하게 프랑스 경찰 공문서에 나타났다. 1926년1월8일 프랑스 경찰국은 등소평의 거처를 수사하였다. 다행히도 1월7일 밤, 등희현과 19명 동지들은 소문을 듣고 비밀리에 프랑스를 떠났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10월 혁명의 고향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중산대학에서 체계적인 혁명 이론을 배웠다. 이곳의 수업 과정은 그의 귀국 후 혁명 활동과 혁명 투쟁에 한층 이론 기초와 투쟁 기초를 수립하였다. 한 부의 모스크바에 있을 적의 자서전에서 등희현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유럽 단체 사업에서 언제나 능력이 부족함을 느꼈고, 결과적으로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이것으로 러시아에서 수업하려고 결심하였다.”, “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에서 너무나도 천박함을 느꼈다.” 그러므로 나는 러시아에서 매일 같이 노력 분투해야 하며 자신이 공산주의에 대하여 상당한 인식이 있어야 함을 느꼈다.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 더욱 단호히 자신을 당의 사업에 헌신하고, 본 계급에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이때로부터 나는 절대적으로 당의 교육을 접수하고 당의 지휘에 복종하며,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사업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등희현이라는 20여세의 젊은 공산주의 전사의 맹세였다. 그 후 수십년 간의 혁명 투쟁 실천에서 그는 맹세한 약속을 굳게 지켜왔다.
       1926년, 국공합작의 제1회 고조시기에 그들은 제국주의와 봉건 군벌을 반대하는 북벌전쟁을 진행했다. 연말에 등희현 등 20여명 공산당원은 당의 파견으로 귀국하였다. 풍옥상(馮玉祥)의 서안중산군사학교에서 그는 정치처장 직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수개월 후 정세에 변화가 발생했다. 장개석(蔣介石)은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고, “412” 정변을 시작하였다. 풍옥상(馮玉祥)도 자신의 부대에 있는 공산당원을 “축출”시킨다고 통지하였다. 등희현은 분연히 서안을 떠났고, 무한에 도착하여 87긴급 회의에 참석하였다. 87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원은 단호히 진독수(陳獨秀)의 우익투항주의를 바로잡았고, 토지 혁명과 무장을 전개하여 국민당 반동분자의 방침에 저항할 것으로 확정하였다. 비밀 환경에 적응하기를 위하여, 그는 본명인 등희현을 등소평으로 바꾸었다. 87 회의 후, 등소평은 중공중앙을 따라 몰래 상해에 도착하였다. 연말에 23살인 그는 중앙 사무총장을 담당하였다. 대혁명 실패 후, 중국 공산당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하여 무장봉기로 국민당 반동파벌의 도살 정책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1929년 25세인 등소평은 중공중앙 대표로 광서(廣西)에 파견되어 중공 광서(廣西) 선봉위원회 서기를 담당하고, 단독으로 한 지구의 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는 광서(廣西)에서 선후로 장원서, 이명서, 위발군과 함께 백색 무장봉기와 용주 무장봉기를 개시했고, 홍7군과 홍8군 및 좌우강 혁명근거지를 창립하였다. 그의 지도 하에 홍색 지구는 20여개 현까지 확장되었고, 100만여명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비교적 큰 혁명 근거지를 건립하였다. 이 기간에 당내에는 모험주의 방침을 실행하였다. “좌”경 사상의 착오, 특히 군사 지도 방침의 착오가 혁명근거지에서 완전히 관철되었다. 등소평이 왕명 노선의 “대도시 공격”의 “좌”경 착오를 배제하였기 때문에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등소평이 “좌”경 착오에 다른 의견을 제출하였지만, 채납되지 못했다. 후에 그가 상해에 도착하여 사업을 보고할 때, 《홍7군 사업보고》를 제출하여 무장봉기 전후의 경험과 교훈을 총결하였다. 그 후 상해 당중앙은 그를 강서(江西)로 전근시켰다.
       등소평과 강서(江西)는 마치 일종의 특수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일생 동안 3차 정치적인 고난을 겪었는바, 첫 고난이 강서(江西)에서 발생했고, 두 번째로 강서(江西)로 추방되었으며 실제로 그의 본적도 강서(江西)였다.
       1931년 여름, 등소평은 강서(江西) 중앙 혁명 근거지에 도착하여 선후로 중공 서금현위 서기, 회창 중심현위 서기, 강서성위 홍보부장을 담당한다. 등소평은 모택담, 사유준, 고백 등과 함께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정확한 노선을 집행하여 “도시 중심론”를 반대하였고, “좌”경 토지 분배 정책을 반대하였는바, 그때 “좌”경 노선의 임시 중앙은 등소평, 모택담, 사유준, 고백을 반대하는 투쟁을 진행하여 당내 “좌”경 분자에 의해 면직당했고 최후로 당내 엄중 경고 처분을 받았다. 이것은 등소평의 정치 생활에서의 첫 좌절이었다. 후에, 정치부 주임 왕가상(王稼祥)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등소평은 홍군 총정치부에 전근하였고, 이 10년 전의 편집장 《적광》 잡지의 “등사 박사”는 또 한 번 《붉은 별》 신문의 편집을 주관하게 되었다. 1933년8월∼1935년 준의 회의 개최 전, 등소평은 모두 70여차의 《붉은 별》 신문을 편찬하여 출판하여 부대의 정치적 각성과 군사 레벨 향상에 매우 큰 작용을 발휘하였다. 특히 장정 도중에 《붉은 별》 신문은 대부분 많은 홍군의 건강 식량으로 되어, 사기를 고무했고, 투지를 격려하였으며 혁명의 필승 신념을 증가하였다. 1934년 10월 제5회 “포위 토벌”분쇄의 실패로 중앙 홍군은 남방 근거지를 떠나야 했고 장정을 시작하였다. 등소평 장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으로 전환점으로 되는 준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번 회의에서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의 정확한 지도자그룹을 형성하였다.
       1937년7월, 항일전쟁 폭발 후, 형세의 피박으로 국공 제2회 협력을 실현하였다. 8월에 모택동, 주덕(朱德), 주은래(周恩來)는 《중국혁명군사위원회 명령》에 서명하여, 중국노농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나중에 제18집단군으로 개편)으로 개편하였다. 등소평은 8로군 정치부 부주임을 담당하고, 나중에는 129사 정치 위원을 담당하였다. 유백승은 129사 사장을 담당하고, 이때로부터 유백승과 등소평은 13년이라는 협력을 시작하였고 전투 속에서 짙은 우정을 맺었으며 “유등불가분”이라는 미담이 전해졌다. 류등의 129사는 일본군 점령 지구의 후방에서 태행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악 지대에 의지하여 평원으로 발전하였고 일련의 전투를 시작했으며 그중 유명한 “백단대전”도 포함하였다. 이러한 전투는 호되게 일본군 및 괴뢰군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었다.
       1943년10월에 등소평은 중공중앙 북방국 서기를 대행하였고 8로군 본부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일본관과 괴뢰군의 “소탕”을 분쇄하면서 전 지역을 정당, 군대 및 정권 건설을 지도하였고 정풍 운동을 전개하고, 행정기구 간소화, 소작료 인하 정책과 대생산 운동을 진행하였다. 태행산에서 사업하는 이 시기는 등소평이 정치적인 성숙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항일 전쟁이 결속될 때까지, 등소평과 유백승은 부대를 거느리고 태행, 태악, 기남, 기노예 등 4개 혁명근거지가 기본적으로 이어지게 하였고 전국적으로 가장 큰 해방구로 되었다.
       1945년8월에 일본이 투항하였고 어려운 8년 항일 전쟁도 결속되었다. 인민이 승리를 즐겁게 축하할 때, 장개석(蔣介石)은 또다시 내전을 발동했고 중국은 두 가지 운명의 십자로에 직면하였으며 두 가지 앞날을 선택해야만 했다.
       10월에 유백승과 등소평은 상당, 평한 전역을 지휘하여 강력하게 중경 담판에 협력하였고, 국공 정전 협정의 조인을 촉진하였다. 전면적인 내전이 폭발한 후, 유등 대군은 용해로 남북에서 9차로 국민당 군대와 작전하여 구전구첩의 대승리로, 유등 대군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1947년 모택동은 완전하게 국민당 군대의 중점 진격을 분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전략적인 반격에 전입하기로 결정지었는바, 주력으로 해방구 밖으로 이끌어 전쟁을 국민당 통치 구역에 확장되게 하였다. 누가 우선 포위를 돌파하여 작전의 중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모택동은 유등 대군을 선택했고, 그는 유등 대군이 후방을 상관하지 말고 반달이라는 시간으로 대별산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1947년6월30일 깊은 밤, 유등 대군의 12만 전사들은 앞에서 가로막고 뒤에서 추격하는 준험한 형세에서도 황하를 넘어서 한 갈래를 혈로를 개척하여 천리 길을 도보로 대별산에 도착하였으며 이것으로 인민해방군 전략적 진격의 서막을 열었다. 이때로부터 전선은 황하 남북에서부터 장강 북안으로 확장되었고 중원 지구가 국민당 군대가 해방구를 침략하는 중요한 후방으로 되었으며 인민해방군이 전국적인 승리를 취득하는 전연 진지로 되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적 이동은 전국 각 전쟁터의 전략적 진격을 움직였다. 전쟁 구조도 이때로부터 근본적인 전환이 발생하였다.
       1948년 가을, 중외 역사성에서 “중국의 세기 대전”으로 부르는 요심, 회해(淮海), 평진 등 3대 전역의 서막을 열었는바, 회해전역은 중외의 많은 전쟁사에서 한차례의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전쟁사를 엮었는바, 장개석(蔣介石)은 선후로 약 80만에 달하는 군대를 집결시켰고, 인민해방군의 참전 부대는 약 60만명이였으며 무기에서도 국민당 군대는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을 서기로 하는 전선위원회의 현명한 지도로, 66일간의 전투를 걸쳐 모두 55만명의 적군 소멸하였고 회해전역의 완전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모택동은 후에 회해전역을 높이 평가하면서 시기가 숙성되지 않았지만 한번 최후의 승리를 따냈다고 말하였다.
       1949년 3월 모택동 주석과 주덕(朱德) 총사령관이 발표한 전국 진군 명령을 받들고 등소평을 서기로 하는 전선위원회는 제2, 제3야전군을 통솔하여 경호항 전역을 개시하였고, 4월20일 밤에 인민해방군의 100만대군은 장강을 일거에 건너서 국민당 군대의 장강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남경, 상해와 강소성, 안휘성(安徽省), 절강성, 강서성(江西省) 등 지역을 해방하였다. 남경의 해방은 국민당 반동 통치의 전멸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대 전역에서 등소평은 전략을 작성하고 재능을 크게 발휘하여 전략가, 군사가의 지혜와 결심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1949년 9월에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서 장엄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등소평도 건국 위인으로 건국의식에 참석하였다. 나중에 그는 또한 유백승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중국 서남부를 해방하는 전투에 뛰어들어 국민당 반동 세력을 중국대륙에서 내쫓았다.
       새 중국 창립 후 등소평은 중공중앙 서남국 서기를 담임하면서 유백승, 하용(賀龍) 등과 함께 토비를 숙청하는 동시에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단결하였고, 각 방면의 적극적 요소를 동원하였으며, 각 민족의 단결을 촉성하고, 순조롭게 토지 개혁과 기타 사회 개혁을 완성하였으며 각급 정권 건설을 강화하였고 재빨리 혼란한 국면을 돌려세웠다.
        등소평이 서남지구에서 사업할 때 두 가지 중요한 사업을 완성했는바, 하나는 티베트의 평화 해방을 추진하여 조국의 평화 통일을 촉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첫 철도인 성도-중경 철도를 건설하여 사천 인민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1952년 7월 성도-중경 철도 개통식에 참가한 후, 그는 전 가족을 거느리고 사천을 떠났다. 이번 사천을 떠나는 것은 등소평 정치 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된다. 그는 정무원 부총리 겸 재정 경제 위원회 부주임을 맡았고 나중에는 정무원 교통 사무실 주임과 재정부 부장을 겸임하였다. 1954년에 50살에 나는 등소평은 중공중앙 사무 총장,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담임하였다. 고강, 요수석의 정당 분열 및 정당과 국가 최고 권력 탈취를 반대하는 중대한 투쟁에서 등소평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55년 4월, 중국 공산당 제7회 제5차 중앙 전체회의에서 그는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추가 선발되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은 제8회 전국대표대회에 개최하였고 대회는 당과 국가의 사업 중점을 경제 건설에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등소평은 회의에서 정당 헌장 수정 보고를 제출했고, 정당 집정 조건에서 자체 건설을 강화할 임무를 논술하였다. 나중에 중국공산당 제8회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52세인 등소평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모택동을 핵심으로 하는 중앙 지도 그룹의 중요한 성원으로 되었다. 모택동은 등소평을 총서기로 추천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비교적 사업을 정확하고 면밀하며 적절하게 처리하며 인품도 훌륭하다. 모택동이 등소평을 중시하고 칭찬하는 것으로 통하여 이점을 알 수 있으며 1959년에 등소평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담당하였다.
       등소평은 중앙 서기처 사업을 10년간 주관하였다. 등소평은 총서기 담임 기간에 자주 실제적인 조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다망한 시기였다. ”중국이라는 가난하고 낙후한 동방대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면 지금까지 그 누구도 겪어본 적인 없는 역사 과제에 봉착하게 되며 발전은 많은 곡절을 겪게 된다. 1957년9월~10월 사이에 모택동은 당의 제8회 제3차 중앙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8가지로 우리나라 사회주의 모순을 판단했고, 정당은 지도 사상에서 “좌”경 착오를 범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당의 제8기 대표대회 2차 회의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노선을 통과하였다. 그것은 인민 군중의 절실한 경제, 문화가 낙후한 상황을 개변하려는 소망을 반영하였다. 동시에, 객관적인 경제 규칙을 소홀히 함이 나타났고 성공에 서두르고 맹목적으로 속도를 추구하고, 대약진의 착오를 범하였다. 이 시기의 잘못에 대하여, 등소평은 그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고 과거의 잘못을 모택동 한 사람에게 돌아놓을 수 없으며 이로부터 등소평이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을 체현하였다.
       1962년 2월, 중국공산당은 유사 이래 규모가 가장 큰 한차례의 중앙 회의에 개최했고, 중앙 주석에서 현 위 서기까지, 회의에 출석한 대표는 모두 7118명이며 7천명 대표대회라고 부른다. 등소평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민주집중제를 견지하고, 전당의 민주 활동을 건전히 하며 정당의 우량한 전통을 회복하고 발양해야 한다. 우리가 정권을 틀어쥐었고, 권력을 잡았으므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 대회에서 공산당은 실제에 근거해서 올바른 행동을 취하는 정신으로 사업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어떻게 농민의 생산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관심하는 문제로 되었다. 7월에 등소평은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제3회 제7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전체 동지들을 접견하는 연설에서, 사천의 속어인 “노랑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기만 하면 다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형상적으로 농촌 생산관계 조정 속에서 어떤 생산관계 형식이 대중의 적극성을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형식을 채용할 수 있었다. 정당의 방침과 정책을 제정할 때 모두 실제에 입각하고 인민의 근본적인 이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실사구시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명언이 문화혁명에서의 그의 첫 죄증으로 되었다. 등소평은 총서기를 담당할 때, 7차나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거느려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와 교섭을 진행하고, 단호히 중국공산당의 독립 자주 원칙의 입장을 지켰다.
       1966년 “문화대혁명”은 시작된 후, 등소평은 잘못된 비판과 투쟁을 받았고,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으며, 혁명 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기구한 시기를 경험하였다.
       1969년 10월, 등소평은 강서성(江西省) 신건현에서 3년간 일하였다. 이때, 그는 대량의 마르크스 레닌 저작과 동서고금 서적을 읽었다. 1971년 림표 그룹의 멸망은 어렵게 지내는 등소평에게 기회를 가져왔고 모택동은 등소평을 다시 영도 사업을 주관하게 하였다.
       1973년4월12일, 오랜 세월 소식이 없었던 등소평이 인민대회당의 연회석에 나타났고 각국 미디어들이 다투어 소식을 보도하였다. 서방 나라의 한 잡지는 또한 그에게 “타도할 수 없는 동방의 난쟁이”로 불러주었고 나중에 등소평은 국무원 부총리 직무를 회복하였다. 그는 1974년 유엔 제6회 특별 회의에서 계통적으로 모택동의 3개 세계 구별 이론을 명백히 논술하였다. 제4회 인민대표대회 준비 단계에 모택동은 그를 “귀한 인재이고 정치사상은 강하다.”고 평가하였다. 1975년1월, 등소평은 중공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을 담임하였다. 주은래(周恩來)가 병으로 치료하는 기간에 모택동의 지지로 등소평은 정당, 국가와 군대의 일상 사업을 주관하였다. 등소평은 사업기간에 필사적인 노력으로 전국 가 영역의 사업에 대하여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짧은 시일 이내에, 군대, 공업, 농업, 교통, 과학 교육, 문예 등 영역에서 전면적인 정돈 효과를 있었고 전국의 정세도 분명히 좋아졌으며 주은래(周恩來)의 힘센 지지와 전국 인민의 큰 지지를 받았다. 최초에 모택동은 등소평의 사업에 대하여 지지하였으나 모택동은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에 대하여 참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주관으로 “문화대혁명”을 긍정하는 결의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등소평은 이에 대하여 명확히 표시하였다. 내가 이런 결의를 작성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나는 중등 인물로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1975 연말에 모택동은 이른바 “등소평을 타도하고 우경 번안풍을 반격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76년1월에 주은래가 서거하였다. 4월5일에 천안문 광장에서 주총리 애도 모임이 발생하였고 “4인방”을 반대하였고 등소평을 지지하는 대중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4인방”은 이 기회를 타서 사실을 꾸몄고 무고한 죄로 등소평이 다시 당 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하게 하였다. 비록 그는 타도되었지만, 그의 지도로 진행된 “문화대혁명”을 전면적으로 정리하는 사업은 당 내외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닦아놓았다.
       1976년10월 이후 “4인방”이 분쇄된 후, 중국 경제 사회는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그림자 속에서 배회하였다. 1977년4월, 사업을 회복하지 못한 등소평은 중공중앙에 편지를 발송하여 “(모주석이 결정한 것은 모두 지켜야 하고 모주석이 지시한 것은 언제나 따라야 한다.)는 잘못된 방침에 대하여 정확히 모택동 사상을 이용하여 우리 사업을 지도할 것을 제출하였다. 5월에 중공중앙은 회답 편지를 발송하여 등소평의 정확한 의견을 긍정하였다. 많은 당원과 인민 군중의 절실한 요구와 엽검영, 진운 등 전세대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추진으로, 7월에 중국공산당 제10회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등소평의 중공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참모 총장의 직무를 회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등소평은, 솔직하게 말하였다. 사업을 다시 시작할 때 두 가지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직무를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가 당신이 공산당원으로 되게 하였는가, 그렇다면 직무회복이 문제가 아니고 사심과 잡념이 없어야 하며 다른 선택은 없다.
       세 번 복귀할 때 등소평은 이미 72살의 고령 노인이었다. 보통 노인으로 말하면, 72살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등소평도 자신의 앞날이 멀지 않음을 느꼈고 남아있는 생애를 무한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업에 바치고 가장 짧은 시간에 국가의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하기를 바랐다.
       등소평이 복귀한 후, 전국의 각 영역에 대하여 과감하게 혼란한 국면을 틀어잡았다. 그는 우선 과학 기술과 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돌파구를 찾았고 기타 분야의 혼란 형상을 바로 잡았다. 1977년 등소평의 추진과 영도하에 중국은 11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생 모집 시험제도를 회복했고, 당시 전국적으로 570만의 청년들이 시험에 참가하였다. 1978년3월에 등소평은 전국 과학대회 개막식에서 연설을 발표하여 과학 기술이 생산력이라고 언명했고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이며,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였고 그들이 현대화 건설에 헌신하도록 동원하였다.
       위대한 사상 해방 운동을 지도하였다. 실사구시는 모택동 사상의 정수이며 “두 가지에 무조건 따르는”잘못된 관점을 반대하였고, 진리 표준 문제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때로부터 오랫동안 사람들 사상을 굳어버리게 하는 국면을 타파하였다.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제11회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 전야의 중공중앙 회의에서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적으로 일하며 일치하게 미래를 구상하는》 연설을 발표하여 하나의 정당,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모든 것에서 이론에 따르고 사유가 굳어 있으며 미신이 성행한다면 전진할 수 없고, 생기가 없게 되며 당과 국가가 망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 연설은 실제로 제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테마 보고이며, 신시기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새로운 이론의 선언서이기도 하다. 나중에 개최한 제11기 제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과 국가의 사업핵심을 경제 건설에 전환하는 총적 방침을 확정했고, 동시에 회의는 등소평이 새 중국 제2세대 지도 핵심인 지위를 확립하였다.
       등소평은 추진으로 억울함을 당한 명예 회복으로, 전국적으로 300만명 간부의 억울한 사건에 대한 명예 회복하였고 정당의 실사구시 우량한 전통이 회복되고 발양되었다. 동시에 등소평은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다수 의견을 물리치고, 과학적으로 모택동 동지의 역사적 지위를 평가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등소평이 작성한 《건국 이래 정당의 일부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과하여 정당이 지도 사상에서의 혼란한 국면을 기본적으로 바로잡았다.
       당의 제11기 제3회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 이후, 중국의 개혁 개방은 한나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등소평이 제창한 사상 해방 및 실사구시의 고무하에 농촌 개혁, 도시 경제 개혁, 정치 체제 개혁과 대외 개방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개혁과 각 방면 사업의 득실을 판단할 때, 결국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사회주의 국가의 전체적 국력 향상에 유리한가, 인민의 향상된 물질문화 생활 표준에 유리한지 판단해야 한다.
       1992 연초에 등소평은 무창(武昌), 선천, 주해, 상해 등지를 시찰하면서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고 중국 공산당 제11기 제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이래 개혁 개방의 기본 실천과 기본 경험을 총결했으며, 명확히 사람들의 사유를 속박하는 많은 중대한 인식 문제를 명확히 했고, 진일보로 당의 기본 이론을 풍부히 하고 발전시켰다. 등소평의 남방 담화는 개혁 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단계로 추진하는 또 하나의 사상 해방 및 실사구시의 선언서로 되었다.
       1992년에 개최한 중국 공산당 제14회 대표대회에서는 등소평이론을 당의 헌장에 써 넣었다. 남방 담화와 제14회 대표대회를 기준으로 중국 사회주의 개혁 개방과 현대화 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1997년2월19일에 이 중화 민족의 진흥 위하여 70년 남짓이 분투한 공산당원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오늘날 우리가 이분을 모범으로 공산당원의 기준으로 시대와 같이 하면서 인민과 고락을 같이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업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것이 이 등소평에 대한 가장 좋은 기념이다.
       우리 다시 한번 이 세기 위인의 진실한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중화 민족 일원의 자격으로, 세계 공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중국 인민의 아들이다. 나는 나의 조국과 인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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